세상과 백성의 나아갈 바른 살핀 다산(茶山) 정약용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이자 봉건질서를 타파하고자 노력한 개혁가 정약용(1762~1836)은 출중한 학식과 재능으로 조선후기 개혁군주였던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정조를 도와 거중기를 제작하고 수원화성을 세우는 데 기여하는 등 발명가로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1801년 남인을 제거하려는 반대파 노론 세력에 밀려 신유박해에 연루되면서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탄압까지도 하늘의 뜻이라 받아들였던 다산은 그 기간 동안 학문탐구에 전념해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기에 이른다. 단지 이론에 머물러 있는 쓸모없는 학문을 지영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했던 그는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진정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평생 고민했고 이를 책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백성들을 향한 그의 애민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천연두로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치료법과 예방법을 제시한 <마과회통>을 비롯해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고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목민심서>, 국정 운영의 전반적인 근본개혁 안을 제시했던 <경세유포>,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바르고 신중하게 판결하라는 요지를 담은 <흠흠신서>등을 통해 그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청렴과 정의’ 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도로고 요구한다. 한 번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
관리들에게 청렴과 솔선수범을 강조한 목민심서(牧民心書) 다산은 목민관의 첫 번째 임무로 ‘씀씀이를 아끼라’고 했다. 그가 아들에게 남김 유산도 단 두 글자 ‘근검(勤儉)’이었다. 그가 말한 절약은 사유(私有)와 공유(公有)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목민심서에서 그는 ‘공적인 물건을 자기 물건처럼 아껴야 현명한 수령’이며, 나아가 청탁이나 뇌물은 드러나기 마련‘이라 고 말한다. 그리고 옳지 않는 길이면 가지 말고 스스로 솔선수범하라고 강조한다.
다산의 마음이 스며있는 생가 여유당(與猶堂) 57세가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 온 다산은 그가 태어난 생가 여유당에서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 이름을 내걸었던 여유당에는 ‘살얼음이 언 겨울 냇가를 건너듯 사방을 두려워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행동을 함에 있어 주위를 먼저 살피 고 신중하라는 뜻이다. 다산이 생전 가장 사랑했던 책은 ‘주역’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적은 <주역사전>이라고 전해진다. 퇴계, 율곡, 성호, 다산 등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들은 모두 주역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그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1804년 최초의 갑자본이 출간된 이후 1808년 최종 무진본이 간행될 때까지 4번의 개고를 거칠 정도로 그의 주역사전의 완성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의 저서 여유당 전서를 통해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후손들에게도 주역에 밝은 사람을 만나면 자신을 만난 것처럼 대하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주역은 백성들을 위하는 선의에서 어떤 정책을 실시하려고 하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그 일이 과연 하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책이었다. 그 천명을 지상에서 실현하는 것이 이상사회가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쓴 주역사전이 바로 그런 사회를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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