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고 검소했던 청백리의 표본 백사(白沙) 이항복 오성과 한음 일화로 유명한 이항복(1556~1618)은 참찬 벼슬을 지낸 이몽량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서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았고 사흘 동안 울리 않아 점을 봤는데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크게 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는 축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오성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오성대감으로 불리게 된 별칭으로 그는 명종 11년부터 광해군 10년까지 거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권율의 사위기기도 한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와 왕비, 왕자를 호위하는 일을 담당했다. 1597년 병조판서로 재임하고 사임할 때 까지 5번이나 병조판서를 지냈던 그는 마음 씀씀이가 바르고 밝아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사람을 발탁할 때 오직 그 재능의 유무만 보았으며 오로지 공론을 따랐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비난과 칭송에 대해서는 맑은 거울에 곱고 추한 모습이 한 순간 지나가는 것처럼 태연하였다. 1617년 선조의 정비인 인목대비가 덕수궁에 유폐되고, 평민으로 만들자는 폐모론에 극렬하게 맞섰던 그는 결국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별세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라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여 이러한 견책을 받았으니 내가 죽거든 조복(朝服)으로 염을 하지 말고, 평소에 입던 옷과 띠를 사용하라’는 말로 근검절약의 본을 보여주었다.
나누고 베풀었던 검소한 청백리의 상징 이항복은 어릴 때부터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어린 시절 하루는 새 옷을 입고 밖을 나갔다가 아이들이 그 옷을 부러워하자 옷을 다 벗어주고 돌아왔으며, 신고 나간 신발을 벗어주고 맨발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정승을 지내는 동안에도 집안에는 저축한 쌀 한 섬이 없었고, 거처하는 집도 겨우 비바람을 피할 정도로 헐고 누추했다. 이웃에 평소 이항복을 스승으로 섬기던 한 관리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영남 안찰사로 있던 그가 하루는 이항복을 찾아와 “대감께서 사시는 집이 너무 초라하니 다른 곳에 새집을 짓게 되면 제가 그 값을 모두 치르겠습니다.”라고 제의하자 이항복은 “지금 자네가 백주에 나라의 재물을 훔쳐서 나에게 주겠다는 말인가”라고 웃었다고 한다. 율곡과 광해군도 알아본 충신이지 명신 율곡 이이와의 일화도 구전된다. 율곡이 세상을 떠나기 전 이항복에게 ‘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니’라는 말을 남긴 바 있는데, 당시 이항복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가게 된 이항복이 불현 듯 그때의 말을 떠올리게 되면서 고춧가루를 싼 수건으로 눈을 비빈 후 눈물을 흘리자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이런 충신이 있구나!’ 하고 감동해 원병에 나서게 됐다는 이야기다. 선조 때의 명신이자 청백리였던 이항복은 광해군도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광해군의 폭정에 정면으로 맞서게 되면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 그가 당시 철령이라는 고개를 넘으면서 지었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대궐에서 연회에 참석 중이던 광해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고독한 심정과 충정을 다한 애절함에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산서원은 이항복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1631년 포천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창건하였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어 폐지되었던 것을 1971년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항복의 정정과 위폐를 보신 사당 인덕전(仁德殿)과 유생들이 유숙하며 공부했던 동재, 서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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